그의 총격은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어요. 너무 어려 사형은 면했지만, 감옥에서 병을 얻어 스물셋에 세상을 떠났어요.
누군가에겐 압제에 맞선 청년, 누군가에겐 끔찍한 전쟁을 부른 암살자예요. 같은 사람이 정반대로 기억되는 이유를 생각해 볼 만해요.
자료로 보기 — 유묵·사진
사라예보의 용의자 연행 (1914)암살 당일 사라예보에서 한 용의자가 붙들리는 장면이에요. 오랫동안 '프린치프의 체포'로 알려졌지만, 실은 다른 사람이라는 연구도 있어요 — 유명한 사진이 늘 사실인 건 아니죠.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라틴 다리 (사라예보, 현재)암살이 일어난 바로 그 다리예요. 다리 옆 건물은 지금 그날을 기억하는 박물관이 됐어요.출처: Wikimedia Commons · CC BY 2.0암살을 그린 신문 삽화 (르 프티 주르날, 1914)사건을 전한 프랑스 신문의 표지 삽화예요. 빠르게 퍼진 이런 그림들이 사람들의 분노와 전쟁 분위기를 키웠죠.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남긴 말
“나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이 오스트리아에서 풀려나 하나가 되기를 바랐다.”
재판에서 자신의 동기를 밝힌 말이에요. 그의 행동이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일부였음을 보여 주죠. · 출처: 프린치프, 1914년 재판 진술
“내가 아니었더라도, 전쟁의 구실은 어떻게든 찾아졌을 것이다.”
옥중 면담에서 한 말이에요 — 자신의 한 발이 전쟁의 '도화선'이었을 뿐,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는 인식이죠. · 출처: 옥중 면담(정신과 의사 파펜하임 기록)
연표
1894출생
1914.6.28사라예보에서 대공 부부 암살
1914재판·수감(미성년에 가까워 사형 면함)
1918옥중 병사
한 청년의 짧고 무거운 길
보스니아 시골에서 시작해 사라예보의 한 모퉁이를 거쳐, 감옥에서 끝난 스물셋 해의 길이에요.
현재 지도 위 표시예요. 한 청년의 좁은 길이, 1천만 명의 운명과 얽히게 됐어요.
빛과 그림자'자유를 위한 행동'과 '수백만이 죽은 전쟁의 방아쇠'가 한 사람 안에 있어요. 목적이 옳다고 결과까지 옳은 건 아니라는 무거운 질문을 남겨요.
더 깊이 (고등·일반)
보스니아의 세르브계 청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청년 보스니아' 운동에 가담했어요. 남슬라브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꿈꿨죠.
그날의 우연
첫 번째 폭탄이 빗나간 뒤, 암살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어요. 그런데 대공의 차가 길을 잘못 들어 그가 있던 모퉁이에 멈춰 섰죠. 몇 미터 앞의 우연이 역사를 바꿨어요.
재판과 수감
범행 당시 그는 만 20세가 안 되어 사형을 피하고 20년형을 받았어요. 함께한 동지들도 재판을 받았죠.
옥중의 죽음(1918)
열악한 감옥에서 결핵을 얻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스물셋의 나이로 숨졌어요. 자신이 당긴 방아쇠가 부른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거예요.
엇갈린 기억
세르비아 쪽에선 '자유의 영웅'으로 동상이 서 있고, 다른 쪽에선 '세계대전을 부른 테러범'으로 봐요. 한 인물을 평가할 때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가 얼마나 다른 그림을 그리는지 보여 주는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