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어요. 아명은 응칠(應七) — 가슴과 배의 일곱 점 때문이었다고 하죠. 천주교 집안에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젊어서는 학교(삼흥학교·돈의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는 교육 운동에 힘썼어요. 총을 들기 전에 먼저 분필을 들었던 사람이에요.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 나라가 무너져 가자 그는 연해주로 망명해 의병(대한의군)에 투신했어요. 1909년 봄에는 동지 11명과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을 혈서로 쓰는 단지동맹을 맺죠. 그 손도장이 찍힌 유묵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 —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러 온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명중시켰어요. 그 자리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며 그는 에스페란토식 발음으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기록돼 있어요.
일본은 그를 뤼순의 일본 법정에 세웠어요. 그는 다섯 달의 수감과 여섯 차례 공판 내내 일관되게 주장했죠 — '나는 개인 자격의 암살자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처단한 것이니 전쟁 포로로 대우하라.' 그리고 이토의 죄 15개조를 낭독해 재판을 일본 침략에 대한 재판으로 뒤집었어요. 일본인 간수들마저 그의 인품에 감복해 글씨를 청할 정도였죠.
1910년 3월 26일, 31세로 순국했어요. 어머니 조마리아가 보냈다고 전해지는 말 —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일이다' — 과 함께,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마지막 날까지 『동양평화론』을 썼습니다. 미완의 원고와 200여 점의 유묵,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한 유해가 남았어요.



